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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제도 아래 전쟁은 왜 끊이지 않았을까

by 중세시대 2025. 4. 1.

서론: 봉건제도는 중세 유럽의 전쟁을 일상화시킨 구조적 원인이었다.

중세 유럽은 전쟁의 시대였다. 국경을 넘는 대규모 전쟁뿐만 아니라, 지역 영주들 사이의 무력 충돌, 성곽을 두고 벌이는 분쟁, 심지어 종교적 구실 아래 벌어지는 내부 학살까지, 전쟁은 중세 사회의 일상적 풍경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전쟁이 끊이지 않았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봉건제도(feudalism)라는 사회 구조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봉건제도는 중앙 권력이 약하고, 지방 영주들이 독립적인 무력을 소유하며, ‘계약에 의해 유지되는 권력 분산형 체제’였다. 겉보기엔 안정적이고 질서 있는 사회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이해관계가 충돌하면 언제든지 칼을 빼들 수 있는 위험한 체제였다.

이 글에서는 봉건제도 하에서 전쟁이 왜 그렇게 자주, 그리고 쉽게 발생했는지를 정치·사회·경제·문화 전반에서 분석하고, 끊임없는 충돌의 근본 원인과 역사적 결과를 함께 살펴본다.

1. 봉건제도의 구조: 전쟁을 내포한 정치 시스템

봉건제도는 군주(왕)가 자신의 토지를 하위 귀족(영주)에게 분할해 주고, 그 대가로 충성 서약과 군사적 의무를 받는 구조였다. 겉으로는 ‘서로를 보호하는 상호 계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내재적 갈등 구조를 품고 있었다.

  • 왕은 모든 지역을 직접 통제하지 못함
  • 영주는 사실상 독립된 ‘작은 국가’의 지배자
  • 각각의 영주들은 사병을 운영하며 군사력 보유
  • 서로의 권리와 경계는 불분명하고, 종종 중첩됨

즉, 봉건제 사회는 하나의 왕 아래 수많은 ‘반쯤 독립된 무력 세력’이 공존하는 구조였으며, 이는 곧 충돌이 상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시스템이었다.

봉건제도 때 끊이지 않았던 전쟁

2. 중앙 권력의 약함: 조정자 없는 권력 다툼

중세 봉건사회에서 왕은 이론적으로는 ‘최고 권력자’였지만, 실제로는 지방 영주들의 협력 없이는 어떤 정치·군사 행위도 할 수 없었다. 지방 세력의 반발이나 비협조는 왕권을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 왕은 세금을 자율적으로 거둘 수 없었고, 전쟁 시 영주들의 병력을 ‘빌려서’ 사용해야 했다.
  • 영주는 자신의 봉신에게 독자적으로 전쟁을 선포하거나 방어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다.
  • 왕권이 약해지면 영주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에게 도전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했다.

이처럼 중앙 권위가 약한 사회에서는 분쟁 조정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며, 문제가 발생하면 각자 ‘자기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그 결과, 사사로운 분쟁도 곧 전쟁으로 비화하게 되는 일이 빈번했다.

3. 토지가 곧 권력: 경계 분쟁과 상속 전쟁

봉건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토지였다. 토지는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의 원천이었고, 동시에 후대에 상속될 수 있는 세습 자산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에는 현대처럼 경계가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지 않았고, 지도조차 부정확했기 때문에 토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 토지 경계가 애매하여 이웃 영주와의 충돌 빈번
  • 후계자 없이 사망한 영주의 영토를 두고 왕과 다른 귀족이 경쟁
  • 결혼, 혼인 동맹으로 인해 땅의 소유권이 복잡해짐
  • 왕의 봉토 분배를 둘러싼 불만과 시비

토지는 곧 전쟁의 명분이었고, 이를 둘러싼 갈등은 곧바로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다. 특히 상속 문제로 인한 전쟁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흔한 전쟁 원인 중 하나였다. 대표적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1453)**도 양국 왕실의 상속권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4. 기사 계급의 존재 자체가 전쟁을 전제로 했다

중세 유럽 사회에는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계급’, 즉 기사(Knight) 계층이 존재했다. 기사는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토지를 받고 군사적 의무를 수행하는 전사 귀족이었다.

  • 어린 시절부터 전투 기술을 익히고, 말을 타며, 검과 갑옷을 갖춘 존재
  •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을 당연시 여김
  • 지방 영주의 호출에 언제든지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음

이러한 구조는 기사 계급이 있어야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있어야 기사 계급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였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전쟁이 멈추면 기사 계급의 존재 이유도 사라지기에, 전쟁은 오히려 지속되어야 할 필요조건이 되기도 했다.

5. 전쟁은 곧 경제였다: 약탈과 부의 재분배

현대의 전쟁은 막대한 비용과 희생을 수반하지만, 중세의 전쟁은 때때로 ‘수익성 있는 사업’이었다. 특히 소규모 분쟁이나 지역 전투의 경우, 전리품 약탈과 포로 몸값 요구 등으로 전쟁이 실제 경제적 이득을 제공하기도 했다.

  • 적 성을 함락하고 주민을 노예로 팔거나, 재산을 약탈
  • 귀족 포로를 잡고, 막대한 몸값을 받아냄
  • 교회나 수도원을 습격해 금은보화를 약탈
  • 영지를 점령하면 세금을 독점적으로 수취 가능

이처럼 전쟁은 경제적 목적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방어 차원이 아닌 이득을 위한 능동적 공격이 장려되기도 했다. 특히 왕실이 아닌 지방 귀족들은 세금보다 전쟁 약탈로 수익을 얻는 방식에 익숙했다.

6. 종교와 전쟁의 결합: 성스러운 폭력의 정당화

중세 유럽에서 종교는 전쟁의 원인이자 명분이 되었다. 교회는 특정 전쟁을 '신의 뜻'이라 칭하며 정당화했고, 이는 봉건 영주들에게 ‘신성한 싸움’이라는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 십자군 전쟁: 교황의 지시로 대륙 전체의 기사와 영주들이 전쟁에 나섬
  • 이단 박멸 전쟁: 알비주아 십자군처럼 이단을 명분으로 내세운 내전 발생
  • 국내 종교 갈등: 각 지역 귀족들이 서로 다른 종파를 후원하며 무력 충돌

전쟁은 단지 정치적 이유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행위로 여겨졌고, 이는 전쟁을 일상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결론: 봉건제 사회는 본질적으로 전쟁 친화적 구조였다

봉건제도는 표면적으로는 ‘서로를 보호하는 계약 사회’였지만, 실제로는 지속적인 무력 충돌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결함을 가진 체제였다. 왕은 약하고, 영주는 강했으며, 땅은 불명확하게 분배되었고, 기사 계급은 전쟁을 존재 이유로 삼았다. 여기에 종교와 약탈의 경제까지 결합되면서, 중세 유럽은 평화보다 전쟁이 익숙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전쟁이 그 사회의 본질은 아니었지만, 전쟁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시스템이 바로 봉건제였다. 이 시스템은 결국 근대 국가의 등장과 함께 붕괴하게 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중세 유럽을 지배한 전쟁의 논리는 바로 봉건제 그 자체에서 출발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