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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계승 전쟁과 형제 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by 중세시대 2025. 4. 4.

서론:같은 피를 나눈 자들, 그러나 권력 앞에서는 서로의 적이었다

왕위는 영광이지만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중세와 근세를 막론하고, 왕좌는 단순히 혈통만으로 이어지는 자리가 아니었고, 수많은 검과 피로 지켜지고 빼앗기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특히 가장 비극적인 순간은, 형제 혹은 아버지와 아들이 피를 흘리는 ‘왕위 계승 전쟁’이었다.

피로 이어진 가족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은 단순한 정치적 분쟁이 아니라, 감정과 배신, 명분과 야망이 얽힌 비극의 드라마였다.
많은 경우, 왕이 명확한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거나, 다수의 왕자가 동시에 왕위에 욕심을 냈을 때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 글에서는 실제 역사 속 형제간 왕위 계승 전쟁의 대표 사례들을 중심으로,
왜 형제는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했는지, 그 싸움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그리고 왕좌를 둘러싼 전쟁이 한 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해 본다.

1. 왕위는 ‘피’를 이은 자가 아니라, ‘칼’을 든 자에게 간다

왕위 계승이 유혈 충돌로 이어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과거에는 왕이 명확한 계승 순서를 지정하지 않거나, 복수의 자식이 각각 정치 세력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왕위는 이론적으로는 장남에게 승계되지만, 실제로는 누가 더 많은 귀족의 지지와 군사력을 갖추었느냐가 핵심이었다.

  • 장남이 반드시 유능하지는 않았고,
  • 차남이 정치적 야망이나 군사적 실력에서 더 뛰어난 경우,
  • 왕이 생전에 여러 부인에게서 자식을 둔 경우 계승은 더욱 복잡해졌다.

결과적으로 왕위는 형제간 신뢰보다, 군사력과 외교력, 배신과 연합의 정치 게임 속에서 결정되었다.

왕위 계승 전쟁과 형제 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2. 잉글랜드의 '장미 전쟁' – 사촌 형제가 만든 피의 연대기

15세기 잉글랜드를 피로 물들인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 1455~1487)은
‘형제간 전쟁’의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 중 하나다.

이 전쟁은 요크가(York)와 랭커스터가(Lancaster)라는 두 왕족 가문이 잉글랜드 왕위를 두고 벌인 내전이었으며,
사실상 서로 피를 나눈 사촌 형제들 간의 치열한 권력 투쟁이었다.

주요 전개:

  • 양측은 모두 플랜태저넷 왕가의 후손이었고, 누가 왕위 계승권이 더 강한지를 두고 논쟁
  • 헨리 6세(랭커스터가)는 정신 질환으로 정치 공백 발생
  • 리처드 요크 공작이 섭정을 요구하며 전쟁 촉발
  • 수십 년간의 전투 끝에 헨리 튜더(헨리 7세)가 승리하고, 튜더 왕조 시작

이 전쟁으로 인해 왕족과 귀족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잉글랜드는 수십 년간 정치·경제적 혼란에 빠졌다.
피를 나눈 사촌 형제들의 전쟁은 국가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간 대표적 사례였다.

3. 프랑스의 ‘왕자들의 전쟁’ – 형제는 왕을 세우고, 또 끌어내렸다

프랑스에서도 형제간 왕위 다툼은 잦았다.
특히 14세기말, 프랑스 왕 샤를 6세가 정신 질환으로 국정이 마비되었을 때,
그의 형제들과 조카들이 권력 공백을 노리고 충돌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왕자들의 전쟁(War of the Burgundians and Armagnacs)이다.

주요 인물:

  • 오를레앙 공 루이: 샤를 6세의 동생
  • 부르고뉴 공작 장 무서운 자: 왕족이자 다른 파벌의 중심
  • 두 세력은 왕을 둘러싼 섭정권과 국정 주도권을 놓고 충돌

결과적으로 샤를 6세의 아들 샤를 7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지만,
그 과정에서 형제·조카 간의 피비린내 나는 암살과 내전이 반복되었고,
이는 백년전쟁의 후반부 혼란을 가속화시켰다.

4. 고려와 조선에서도 피로 물든 왕좌

형제간의 왕위 다툼은 유럽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 한국 역사에서도 형제가 칼을 겨눈 사례는 적지 않다.

고려: 정종과 광종의 형제 갈등

  • 고려 태조 왕건 사후, 둘째 아들 정종이 왕위에 오름
  • 이후 동생 광종이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권력 강화 과정에서 형제 및 조카 숙청
  • 광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친형의 세력을 제거하는 고강도 숙청정치를 펼침

조선: 세조의 계유정난 (1453)

  •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숙부 **수양대군(세조)**이 실권 장악
  • 계유정난을 통해 김종서, 황보인 등 단종파 제거
  • 결국 단종은 폐위되고, 세조가 즉위

이 두 사례 모두, 왕족 간의 신뢰가 아닌 권력 투쟁이 왕위를 결정한 사례이며,
한반도 역사에서도 왕위는 혈연보다 권모술수와 무력이 더 큰 힘을 발휘했음을 보여준다.

5. 형제간 전쟁이 국가에 미친 영향

형제간의 왕위 전쟁은 단지 가족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여파는 왕실의 권위 실추, 귀족 간 분열, 농민과 시민의 희생, 국력 약화로 이어졌고,
대개 수십 년간 국가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전쟁의 주요 피해:

  • 왕실 피의 숙청으로 인한 왕가의 인적 붕괴
  • 귀족 파벌 간 내전으로 지방 통제력 상실
  • 경제 생산력 하락과 세금 폭증
  • 외세 침입의 빌미 제공

특히 형제간 내전은 국민들에게 왕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아예 왕정 자체를 부정하는 민중 반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6. 왕위 계승 전쟁이 반복된 근본적인 이유는?

형제간의 왕위 전쟁은 왜 끊임없이 반복되었을까?
그 이유는 단순한 탐욕만이 아니라, 중세와 근세 사회의 구조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구조적 원인:

  • 계승법의 모호성: 장자 우선 원칙이 있어도 현실 정치와 배치되는 경우 다수
  • 다처와 후궁 자식 문제: 혼외 자식도 종종 정치 세력화됨
  • 왕권과 실권의 분리: 왕은 명목상의 군주이고, 실권은 형제나 외척이 가진 경우
  • 귀족과 지방 세력의 개입: 형제를 각기 지지하는 정치 연합 형성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왕좌는 단순한 계승이 아닌, 실질 권력 투쟁’ 임을 보여주는 구조적 증거다.

 

결론: 형제의 이름으로 시작된 전쟁, 그 끝은 누구도 웃지 못했다

왕위 계승 전쟁은 늘 같은 결말을 낳았다.
한 사람이 왕이 되었지만, 수많은 피와 희생, 파괴와 혼란이 그 자리를 배경처럼 감싸고 있었다.
형제는 피를 나눈 존재였지만, 왕좌 앞에서는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였고,
정치와 권력 앞에서 형제애는 흔히 가장 먼저 무너지는 감정이었다.

이러한 전쟁은 결국 왕좌만 남기고, 모든 가족의 신뢰를 부순 채 끝이 났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 단순한 역사적 사실 이상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
권력이 결코 혈연을 지켜주지 못하며, 피로 세운 왕국은 언젠가 피로 무너질 수 있다는 것.